영화 증인 &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박주민의원






지난 주말 네이버 시리즈 on에서 베리 굿걸,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백엔의 사랑 등 몇 개의 영화를 다운 받았는데 그 안에 우연히 정우성 김향기 주연의 영화 '증인'도 묻어왔다. 내가 묻어왔다고 말하는 건 영화를 보는 관객의 가족사에 장애를 가진 형제가 있다면 자폐아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는 100% 어두운 다큐일 게 뻔해 그 영화를 피하기 때문이다. 내가 증인을 미루고 미루다 목요일 저녁에야 겨우 본 이유다.



한때(대강 5~6년 전후) 한국 드라마 작가들이 거의 집단적으로 출생 트라우마를 다뤘던 적이 있다. 모든 드라마에 공통적으로 나온 출생의 비밀이란 작가들의 욕망이 투영된 무척 소비적 테마였는데 내 눈에 보인 그 트라우마의 본질이란 현실이 너무 어려워 공주 & 왕자로 변신하고 싶은 대중의 욕망을 작가들이 부채질한 것일 뿐 그 비밀의 출생자가 겪은 황망함을 다룬 건 아니었다. 하지만 수많은 시청자들은 "또 그거야." 하면서 욕까지 하며 열심히 그 드라마들을 시청했다. 그런데 근래엔 작가들이(미국 포함) 한번씩 '서번트 증후군'을 다루는 게 그들의 죄의식을 없애는 데 도움을 받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나는 출생의 비밀을 다루는 드라마를 싫어한다. 내가 그 출생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내 현실은 신분상승 왕자가 아니라 평화로운 바닷가 소년에서 부친의 거친 폭력이 일상인 공간으로의 이동이었다. 그리고 서번트 증후군을 다루는 영화도 싫어한다. 서번트 증후군을 다루는 대표적인 영화로는 톰 크루즈와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한 '레인맨'이 있다. 영화를 보면서 더스틴 호프만이란 배우도 처음 알았는데 나는 그가 진짜 서번트 증후군 환자인줄 알았다. 또다른 영화는 '피아노'를 주제로 한 이병헌 박정민 주연의 '그것만이 내 세상'이 있다. 그 영화속에서 보여준 뛰어난 재능은 수많은 자페 & 지적장애를 가진 부모들의 마음을 더 슬프게 했다. 자신들의 아이와 너무나 대비되었기 때문에.



이번주 목요일의 영화 '증인'이 다행인건 서번트 증후군을 다루긴 하지만 그 현상을 천재적 눈요기감으로 부각시키지 않은 점이고, 자페를 보통의 현상으로 보아달라는 호소가 강해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극중 '지우'의 역할을 맡은 배우도 아름다웠다. 이름만 나열해도 빛나는 정우성 송윤아 박근형 등 스타 배우들이 열연하고 있는 가운데 쪼꼬미같은 배우 김향기가 그 틈바구니에 끼여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녀는 자신의 존재감만으로 빛나고 있어 나는 내 현실을 잊어먹고 그녀에게 반해 팬클럽 가입이라도 할까 하고 생각했다.



영화 스토리는 무척 심플하다 못해 단순하다. 지우가 이웃집에서 일어난 폭력사건을 목격하면서 시작되는 영화는 자폐아인 지우의 순진한 특성을 보여주는데 많은 시간을 들인다. 그런데 우리가 시선을 살짝 돌려서 보면 영화의 촛점이 그녀가 가진 서번트적 천재성보다 그녀의 투명한 단순함이 내면적인 확장성을 가지고 사람들의 가슴에 손을 내밀어주는걸 볼 수 있다. 단순함이 관객에게 자기가 가진 특성이 무엇인지, 존재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보여주는 것이다.



진짜 사랑스런 힘은 자기 안으로 시선을 돌리도록 한다.



"아들, 연락온데 없었어."



외출에서 돌아온 데레사(모친)가 승현에게 물었다. 오후 친척에게 전화가 와 "엄마한테 고추장 가져가라고 해."라는 당부도 있었지만 까맣게 잊어버린 승현은 "네, 어머니. 전화온 데 없었어요." 하고 자기 놀이만 열중한다. 데레사는 이 고추장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듣고서야 며칠 전에 연락이 온 것을 안다. 자페 2급인 내 동생 승현의 대답은 항상 데레사의 '복장'을 터지게 하지만 승현에게 그걸 물어본 사람의 잘못이지 승현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승현의 눈을 보고 있으면 그 명랑한 엉뚱함에 웃을 수밖에 없다. 내가 지우에게 반한 것도 승현과 똑같은 그녀의 천진함 때문이었다. 그건 보여주려고 하거나 가르치려고 하면 절대 드러나지 않는 특성이다. 사랑이 머리로 배워지지 않듯이 지우는 가슴으로 들어오는 사랑을 그저 존재 자체로 온전하게 보여준다. 나는 영화를 다 보고 화면속으로 사라지는 지우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싶었다.



고마워, 지우야!



가벼운 고백을 하면 나는 서번트와는 거리가 먼 정 반대의 존재였다. 10살 때까지 나를 키워주었던 경남 고성의 큰아버지는 나에게 아라비아 숫자를 가르치기 위해 저녁마다 1년 가까이 씨름을 했고, 한글 이름 세 글자를 가르치기 위해 2년을 노력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날 알아도 다음날 모두 잊어버렸다. 또 모든 열정을 다해 1에서 9까지 나열되는 숫자를 가르치기 위해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이상하게 2와 3을 절대 쓰지 못했다. 지금도 나는 2와 3을 잘 쓰지 못하는데 그땐 아무리 똑같이 그리려고 해도 그것만은 그리지 못했다. 큰아버지의 한숨은 늘어갔고, 당신의 노력과 달리 나는 한글은 켜녕 숫자도 쓰지 못한 채 추수가 끝난 들판에 멍하게 서 있었다.



또 나는 늘 집 바깥에 있었다.



저녁시간이 되어 큰엄마나 큰아버지가 들판으로 나를 데리려오지 않으면 그냥 저녁을 건너뛰었고, 다음날 그 다음날도 그곳에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가는 장소도 일정하지 않아 어느날 저녁엔 사촌형과 큰부모님이 한군데씩 산이나 냇가, 다리 위 같은데로 나를 찾으러 다녔다.



비록 큰아버지의 교육이 실패하긴 했지만 국민학교가 의무교육이었기 때문에 큰아버지는 나를 당신이 소사로 일하셨던 마암국민학교에 입학시켰다. 그 입학사건은 선생들과 가족들에게 내 존재가 잊혀지는데 꼭 필요한 장치같은 것이었다. 누구라도 꼭 그 과정을 거쳐야만 잊혀지는 존재가 있다. 그 시간이란 긴 인내와 눈물, 한숨과 체념이라는 한계를 거쳐 포기하는 시간이다. 나는 학교 수업이나 선생님, 교과서나 필통, 육성회비, 노트 등에 대해 어떤 개념도 없었고, 그것들이 왜 필요한지 몰랐듯이 돈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아이들이 줄을 맞춰 걷는 것도 할 줄 몰랐다.



우향우 좌향좌를 시키면 나 혼자 뒤로 가 있었고, 공놀이를 시키면 어느새 학교 연못가에 가 있었고, 운동회를 하면 학교 뒷산에 있었다. 주인을 잃은 신발들은 저마다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다.



솔직히 지금 나는 선생님들을 한 명도 기억하지 못한다.



선생들은 내 빈 노트에서 어떤 영감도 얻지 못했다. 늘 새책이거나 아니면 까만 염소나 토끼들이 뜯어먹은 교과서에서 한숨이 늘어갔고, 점심으로 준 큰 빵이 왜 잘게 부서져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네이버 지도에서 가져온 마암초등학교, 저 나무들은 모두 큰아버지의 작품들이다.





사실 당시의 나는 학교생활에 대한 개념이 없었지만 먹는 것에 대한 개념도 없어서 허수아비처럼 들판에 서 있기 일쑤였고 나 대신 그 모든걸 챙겨야 하는 사람은 마음씨 좋은 큰엄마였다. 그렇잖아도 일이 많았던 큰엄마는 어떤 일이 있어도 놀라는 기색없이 낙천적으로 다섯 명의 아이들을 돌보았고, 3학년 올라갈 때까지 이름도 쓸줄 몰랐던 나를 위해 가방을 싸주었지만 그마저도 내 놀이터 그러니까 해골 인간을 만나고 새들과 뱀, 수리들과 동네 개들, 다람쥐들과 떼지어 놀던 뒷산 묘지에 두고 다녔다.





영화 둘리의 모험에 나오는 이 우주물고기처럼 내가 여섯~일곱 살에 만난 해골인간도 비슷하다.





또 나는 어쩐 일인지 소년이었을 때부터 집에서 자는 것보다 마당의 감나무 아래서 자는 걸 더 좋아했고, 탱자나무 옆이나 학교의 플라타너스 아래를 좋아했다. 그 영역이 점점 넓어져 들판으로 이사했고, 바위 아래 또는 바다가 보이는 옆동네의 산에서 잠들기도 했다.



지금도 나에겐 그 시절의 버릇이 일부 남아 있는데 서울역 광장이나 남산, 삼거리의 은행나무 아래 또는 한강의 잔디밭에서 가만히 앉아 있다 잠드는 것이다. 며칠 전엔 여의도 광장에 앉아 신발에 들어간 모래를 털고 잠깐 쉰다는 것이 그만 깜빡 잠이들었다. 소년이었을 때도 나는 멍하게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 잠들었는데 그때와 지금이 다른 건 앉아 있는 폼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몇 년 전 한강 잔디밭에 앉아있는데 지나가는 여학생들이 자기들끼리 "저 아저씨 명상하나 봐." 하면서 지나갔다.



훗, 명상?



어린날엔 명상이 뭔지 몰랐지만 나는 지금도 명상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동안 사람들의 시선이 변해 가만히 앉아 있어도 괜찮다. 명상이 대중화되어 동네 바보로 보지 않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다. 고백하면 나는 겨우 몇 달 전에야 명상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런데 명상을 해야만 직관을 선물받고 신에게 사랑을 받는 건 아니다. 나는 나에게 필요한 걸 그때 그때마다 에메랄드 불꽃이 터지듯이 모든 문제에 대한 답들을 직관으로 받는다. 한가지 조건은 가만히 있는 것이다. 이럴 때 답이 불꽃처럼 와 있다. 어쩌면 내면에 주어진다고 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어떤 단체나 종교가 자기들이 만든 형식 & 제의를 따라야만 신에게 사랑을 받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지금도 무섭다. 신까지 소유하려 드는 권위주의의 끝판왕이다.



한글을 처음 읽은 때도 기억난다. 아홉살 가을 무렵이었다. 대청마루에서 큰아버지는 당신이 즐겨 읽으시던 삼중당 문학전집을 보고 있었고 나도 그 옆에 같이 누워 물끄러미 책을 보고 있었다. 큰아버지가 성령의 느낌을 받아서 그랬겠지만 나에게 자연스럽게 책을 내밀었고 나는 언제나 읽어왔던 것처럼 천천히 소리내 책을 읽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한참 나를 보던 큰아버지가 정신을 차리고 소리로 질렀다.



"여~보, 빨리 와봐. 승택이가 책을 읽어. 얘가 글을 읽~어...."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던 큰엄마와 가족들이 흥분해 소리를 지르며 모여들었다. 나는 망설임없이 한페이지를 읽었고, 그 사이에 앞집의 필수형 가족도 나타나 축하를 해주었다.



저녁엔 닭을 잡아 파티를 했다. 그 추억은 내가 뒷산에서 해골 인간과 놀았던 것처럼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돌아보면 내가 그때까지 한글을 몰랐기 때문에 읽지 못한걸까. 아니면 성령의 에너지로 한글이 직관으로 주어졌을까? ^^;;



한편 영화 '증인'의 작가가 미쳐 그리지 못해 아쉬운 건 내가 책을 읽었던 그 순간, 그러니까 영화 속 지우가 한눈에 손수건의 물방울 숫자를 아는 그 재능이 어떻게 주어졌는지 그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그 영화를 보고 지우가 마치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듯 보겠지만 사실은 지우에게 그것은 우리가 숨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한글이 나에게 살며시 온 에메랄드 불꽃이었던 것처럼 지우에게도 일상적으로 에메랄드 불꽃이 온 것이고 표현은 다르겠지만 그것은 성령의 힘이 보여준 결과일 뿐이다.



이 직관을 설명하긴 어렵지만 지우에겐 이런 과정을 통해 사물이 보인다. 나는 사람들의 아우라에서 그들이 가진 성질과 그들이 맺고 있는 이해관계를 본다. 그러니 말로 증거가 있느냐고 묻는 건 의미가 없다.



또 한편 내가 일곱 살 때부터 아라비아 숫자와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다정한 패밀리들(큰아버지, 큰엄마, 3학년까지 만난 선생님들, 학교 아이들 등)은 내가 3학년에 올라갈 즈음에서야 나를 온전하게 포기해 주었다. 나는 그때서야 겨우 잊혀졌고, 진짜 자유를 선물받아 뒷산이나 들판, 냇가에서 본격적으로 놀기 시작했다.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해 여름 나는 일주일 정도 냇가에 있었는데 읍네에서 장을 보고 오시던 큰아버지가 "승택아, 여기서만 놀지말고 집에도 놀러와'" 하면서 지나갔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큰아버지에게 이런 감정을 느꼈다.



머싯다!



나는 교육이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적수업 어디에서도 비슷한 말이 있는데 '예수아 채널링'에서 진짜 치유에 대해 "상대방에게 진정한 도움을 주는 것은 종종 있는 그대로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여러분의 태도입니다. 누군가와 진정으로 연결을 맺고 그들에 대한 사랑과 공감의 문을 열게 하는 것은 여러분이 마음의 수준에서 무엇을 바꿔놓으려 들지 않을 때 치유가 일어납니다." 하고 말한다.



나는 교육도 이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 글은 내가 치유를 하면서 침묵해야 하는 이유을 알려주고, 몇 달 전 나에게 교사지침서를 교육하던 유현숙의 말도 떠올리게 한다. 그녀는 "너 처음 만나 교육을 어떻게 해야하나 견적이 안 나왔어." 하고 말했다. 나는 그녀를 보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혼자 씨익 웃었다. 큰아버지처럼 포기하면 될 텐데... 그리고 그녀가 정말 몸으로 체감해야하는 이런 '방치'에 대해서 알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훗날 큰아버지의 이마에 깊이 새겨진 주름과 늘어난 주량을 보고 그게 다 나 때문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한가지 의아한 점은 들판에 있었던 그때 누가 나에게 먹을 걸 주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1987년과 1990년, 2011년 때처럼 내 인생 최대 시련기였던 10살 때 강원도 상동의 부친집으로 보내진 후 심각한 가정폭력으로 가출해야 했고, 무서운 어른들을 피해 꼬마 부랑자로 살았을 때에도 나는 누가 나에게 먹을 걸 주었는지 모른다. 나는 그 1년 동안 몇 번 정도만 음식을 먹은 기억이 있다.



어떻게 살았을까?



그 답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



열 아홉 무렵 처음 본 성경책에 이런 말이 씌어있었다.



"고아와 과부는 하느님이 돌보신다."



난 이 귀절을 보고 빵 터졌다. 성경의 이 말을 나만큼 실감한 사람이 또 있을까. 나는 하하 웃으면서 어깨에 힘을 주었다. 신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소년이라니 멋지다고 생각했다. 10살부터 사회생활을 하며 사람들에게 수많은 질문을 받았다. 특히 자기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한국 사람들이 가장 먼저 묻는 것, 출신학교에 대해 물으면 난 학교를 전혀 다니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글은 켜녕 숫자도 쓰지 못한 주제에 그 초등학교를 조금 다녔다고 말하면 몇 년 동안 나를 돌봤던 선생님들이나 학교가 당황할 것 같아서. 물론 제일 당황할 사람은 나를 학교에 보낸 큰아버지일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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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와 다르게 영화 '증인'의 지우는 무척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영화속에서도 조금 도식적으로 보이는 질문이지만 지우는 양순호변호사를 향해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하고 묻는다. 다행스럽게도 양순호는 금방 자기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과거를 가지고 있다. 2019년 한국의 현직 대통령도 그 단체 출신인 민주변호사회 소속이었고, 좋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당신도 나를 이용할 겁니까?”



지우는 이 질문으로 양순호변호사가 어지러운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도록 했다. 조금 결이 다르지만 이 질문과 무척 닮은 말이 있다. 2천년 전 광장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위해 예수가 한 말이라고 한다.



"누구 죄 없는 자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지우와 예수 두 사람은 꼭 한마디씩 말했지만 진리를 담은 말은 누구의 가슴에라도 충분히 가 닿는다.



편견 때문에 지우의 증언이 무시되어 비록 1심에서 패했지만 2심에서 지우는 온전한 자기의 마음을 돌아본 양순호의 도움을 받아 그 편견을 극복했고, 2천년 전 광장에서 화를 내며 돌멩이를 던진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듯이 양순호도 자기 가슴으로 돌아갔다.



그럼 나는?



예를 들면 자기가 모르는 것을 누군가는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내가 아라비아 숫자를 쓸 수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내가 2011년에 겪은 사건도 영화 속 지우처럼 훈훈하게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내 사건은 지우와 완전히 반대였다. 사람들이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 그러니까 법정에서 사람을 구속하려면 48시간 안에 '구속영장실질심사'☆ 재판을 받는다는 걸 알고 있다. 나도 받았고 신문에도 빈번하게 나오는 이야기다. 범죄를 고발한 검사와 의뢰인의 변호사가 법정에서 사건의 실체를 놓고 이게 사람을 구속할 사안인지 아닌지 치열한 설전을 벌이고, 판사도 그를 감옥에 수감할지말지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다. 그럴려면 양 주체인 검사와 변호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헐, 내 사건엔 변호사가 없었다. 나는 변호사가 왜 없는지도 몰랐다. 불과 3년 전에야 그 자리에 내 담당 변호사가 있어야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감옥을 나온지 3년만인 2017년 여름에서야 그 사실을 알고 무척 궁금했다. 다른 사람들에겐 재판이 상식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나에겐 모든 일이 비정상적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박주민변호사는 왜 그 자리에 나오지 않았을까?



당시 내 담당 변호사였던 박주민은 좌파내에서 유명한 존재였고,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일명 4차원인 존재였다. 외부 사람들은 나를 운동권이라고 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4차원인 것이다. 반면 박주민은 참여연대와 민변 등에서 활약하는 스타변호사였고 또 2011년 봄 광화문에서 인권센터회원 두 명과 함께 벌인 집시법 사건도 담당하고 있는 최고의 변호사였다. 그가 최고라는 것은 지금도 알수 있는데 그는 세월호사건 담당변호사를 거쳐 국회의원이 되었고 현재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다.



우리나라 법정에서 의뢰인의 구속을 결정하는 구속영장실질심사에 담당 변호사가 나오지 않은 사례가 한 건이라도 있었을까. 내 사건에도 형식상 변호사가 없었던 건 아니다. 처음보는 어린 국선변호사가 나타나 자기도 모르는 사건 때문에 한겨울인데도 땀을 흘리고 서 있었다.



영화 '증인'에서 지우는 그녀의 자폐 때문에 증인의 자격이 없다는 '일상적인 무시'를 당한다. 그녀의 장애가 1심에서 패하는 주된 이유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에서처럼 2012년 나의 존재도 박주민변호사와 LIG그룹 부회장 구본상에겐 무시해도 좋을 사회부적응자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구속영장실질심사에 담당 변호사가 나타나지 않은 것처럼 재판의 기본은 몽땅 무시되었고, 판사에게 변호사를 구할 수 있도록 다섯 번이나 팩스를 사용하게 해달라는 의견서를 냈지만 거절되었고, 다른 판사는 편지 한 장에 교체되었으며 심지어 cctv가 없는 공간에서 교도관들에게 둘러싸여 두 번이나 폭행을 당했다.



박주민은 법정의 판사에게 증거를 수집해오겠다고 말하고선 내가 낸 장문의 의견서에 있는 주장에 대해 오히려 "증거 있어요?" 하고 물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듣고 LIG그룹에 박주민이 매수된 의혹이 있다고 판단해 그를 고소하고 해임했다. 나는 고소장에 박주민이 변호사가 의뢰인에 관해 지켜야할 신뢰를 저버렸고, 오히려 내 정보를 LIG측에 넘겨주었다고 썼다.



하지만 기각이 한번 더 추가되었다. 내가 영화 1987과 변호사, 여행자, 박하사탕류의 영화를 보지 못하는 건 개인적 사연도 있지만 주인공들이 당하는 고통을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의 트라우마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 '증인'을 볼 수 있었던 건 나의 두려움을 모두 덮을 수 있도록 환하게 웃어준 지우의 미소 덕분이라고 고백해야 하리라.



고마워, 지우야!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 지우가 간절하게 했던 말을 박주민에게도 들려주고 싶었다.



"박주민변호사님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 지난주 박주민에게 편지를 보낼 때 용어를 몰라 '구속영장실질심사'를 '구속적부심심사'라고 썼다가 정경심교수에 관한 기사를 보고 편지 보낸지 거의 2주만에 고침. 그런데 박주민에게 보낸 질문 편지에도 '구속적부심심사'라고 썼음. 지금 생각하니 박주민은 구속영장실질심사에 나오지도 않았지만 구속적부심심사에 대해서도 의견을 묻지 않았다. 박주민과 법원의 판사, 검사, 변호사는 내가 잘못 쓴 용어를 보고 킥킥 웃을 것이다, 내가 모르는 용어들을 다 알고 있어서 참 자랑스럽겠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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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법전들은 전부 한자로 되어 있을 때 청년 전태일은 꼭 그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지만 대학생 친구가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기 편이 되어줄 친구 한 명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는 박주민이 전태일이 말했던 그 친구로 여겨졌다. 나에게 그는 아이돌같은 존재여서 그가 하는 말을 모두 지지했고, 사소한 사건도 그에게 전화를 했었다. 하지만 자금 와서 돌아보면 그건 내 결핍감 때문에 타인에게 의지한 것이고, 다 부질없는 믿음이었다.
근래 나는 어쩐 일인지 실업자가 되어 무척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갑자기 이 사건이 생각났다. 어쩌면 이 기억을 떠올려주기 위해 영화 증인이 목요 영화로 올라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풀리지 않는 의문을 해결하려고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박주민의원에게 지난주 화요일(2019 10 15) 아래 사진의 질문을 내용증명으로 보내고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사건발생 9년만에 하는 질문이다.
언제 답변이 올지 모른다. 답변이 오면 다시 글을 올리겠다. 하지만 오더라도 전두환과 장세동이 법정에서 했던 말처럼 "기억이 안난다."고 할지 모른다. 지난날 재판중인 내 사건에 용산경찰서 정보과 형사 두 명을 증인으로 불렀는데 내 질문에 기억이 안난다고 말했다. 내 질문은 간단했다.
"비디오 카메라 든 소방서 직원 기억나세요?"
같은 경찰인데 20년 전 화성 사건을 기억하는 형사가 있는 반면 불과 5개월 전 밧줄에 매달려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는, 비디오카메라를 든 소방서직원이 2시간이나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불과 3미터 옆에 있던 그들이 소방서직원에 대해 기억이 안난다고 말했다. 이건 무척 곤란한 기억 상실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나는 일제 비디오카메라를 든, 노란 방화복을 입은 유령을 2시간 동안 보고 있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때도 국선변호사는 옆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과거에 함께 일하던 주변 사람들 현재 직급이 엄청 높아 내가 더 낮아지는 느낌이 든다. 장관에 최고위원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반면 나는 여전히 불가촉천민이고, 감옥에서 마이클 뉴턴의 '영혼의 여행' 시리즈를 탐독하며 뉴에이지 세계관에 빠져들면서 진짜 4차원이 되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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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내가(이승택) 구속된 사건이란 보험 때문에 나에게 세 번이나 거짓말을 한 LIG그룹부회장 구본상을 상대로 벌인 초라한 1인 시위였는데 나는 그 사건으로 총 3년 형을 선고받아 2014년 12월 27일 만기출소했다. 처음 2012고단22 사건으로 1년 형을 선고받았고, 2012고단1451로 2년형을 더 선고받았다. 두 개의 사건은 사실상 동일 사건인데 검찰이 "혼이 더 나봐야 정신을 차린다."며 먼저 사건에 토씨 몇 개 틀린 공소장으로 2년형을 더 선고했다. 반면 검찰은 내가 LIG그룹부회장 구본상의 직원(전직 경찰)에게 폭행을 당해 4주 동안 치료가 필요하다는 고소장은 온전하게 무시했다. '개무시'라고 하는 게 더 온전한 표현일 것이다. 중앙지검의 최수봉검사는 내가 고소장을 낸지 반년 동안 수사를 하지 않다가 반년 후 내일 조사를 하러 오겠다고 통지문을 보내고선 그 다음날 사건을 서부지검으로 이첩했다고 다시 통지했다. 내가 제기한 아홉개의 고소는 이유없이 모두 기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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